노찾사.

 

 

앨범표지에 종종 사용된 이 몇몇 아이들이 지워진 졸업사진의 컨셉이 뭔지 상당히 불안케 한다. 찾아보니 숨은 익명의 대중 누구나 노찾사일 수 있다는 의미라는데 또 한편으로 민주화운동으로 사라진 열사로 재해석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졸업사진에 관한 '이상(異常)'이란 테마로 한 동일한 쇼킹한 호러물 중에 생각나는 것이 한국영화 원조 <여고괴담>이기도 하다. 거기서는 학교를 계속 나오고 싶은데도 나오지 못하는 한많은 귀신이 매번 같은 모습으로 졸업과 입학을 반복한다. 어떤 의미에서 감춰진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다른 이들과 무언가 같아지기를 열망하면서도 그럴 수 없는 존재라는 슬픔과 공포가 공통적으로 암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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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년 어느 일간지 광고란에 실린 그 유명한 <여명의 눈동자>의 소설 광고이다.

글자 그대로 살인, 강간, 폭력, 파괴로 점철된 소설이다.

마치 지옥을 구경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 말하고 싶을 만치.

바로 그 전설적인 김종학-송지나 컴비의 대작 대하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원작이 된다. 원작을 각색하는데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이런 요소들을 적당히 걸러내는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드라마는 다른 그에 못미치는 작품들에 비해 한류수출이 면에서 제한을 받고 있을 정도로 수위가 굉장히 높다. 그 이유는 아마도 소설 광고에서 밝힌 그 것을 완전히 걸러내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사실 이 소설 <여명의 눈동자> 역시 재미는 있지만 그만큼 역겨워서 보통 독한 마음으로는 읽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작가가 무엇 때문에 이런 수위를 고집해서 빛을 볼 수 없는 만년 언더그라운드 상태로 남고자 했는지 의아스럽다. 이런 폭력음란 수위 외에도 각색 중에 걸러내야 할 것이 또 한가지 있었는데 즉 언더그라운드에서 지상파로 올라가기 위해 걸러내야 할 요소가 아마도 휴머니즘적 면이었다. 사실 이런 소설의 주 소재상 휴머니즘이 들어갈 자리는 적다. 실제로 대치로 대변되는 세력에 대해 작가는 좀더 적대적이고 나쁜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그들이 휴머니즘적 인성을 결여한 사람들로 그렸다. 아무튼 이런 것들은 미묘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재평가 경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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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사가 속보로 올라왔다. 선거 앞두고 한 참 북풍중이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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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분석이 유일히 제시된 증거라니. 그 중에는 유명한 탈북가수 김용도 있다. 이 쯤되면 이런 주장 자체가 의심스러워 지기도 한다.

[링크]'귀순가수' 김용

http://www.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pa04&wr_id=1404&page=2

김용 씨의 경우 탈북자로 행세하던 시점에 오히려 더 사진 속의 모습이 젊고 별로 닮아 보이지가 않는다. 만의 하나, 그 역시 광주침투조였다면 북한말 쓰다 다시 광주에서 제대로된 한국말 쓰고 다시 북한말 쓰다 한국말 잘 하면서 다시 어설픈 북한말같은 한국말 쓰고 산다는 이야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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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진을 통한 신원확인이 얼마나 설득력과 증명력을 갖출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들이 찾은 사진 속에서 각종 북한의 로얄페밀리 포함 고위층이 망라되어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사람이 표무원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6.25 직전 자기 부대를 이끌고 월북해 영웅이 된 사람으로 월북동기는 남로당에 가입한 그가 조여드는 숙군수사에 압박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렇게 월북했던 사람이 광주 때에서 보듯 남한을 이렇게 멋대로 드나들었다니 사실(?)이라면 놀랄 일 중에 논랄 일이다.

 

[링크] 월북광수 표무원 (제234광수) 대조표입니다 

www.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pa04&wr_id=1259&page=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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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열며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던 좀 어수선한 시대이다. 이 시대를 그린 소설 중에 <오딧세이아 서울>이 있다. 기억에, 생각하고 보고듣고 말할 수 있는 한 만년필의 시각과 입을 빌어 그 당시의 사람들의 말과 행동들을 엳보게 하여 당시의 세태나 실상들을 보여주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작가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도 자신이 일개 소설가나 작가에 그친 것이 한이거나 혹은 조상 볼 면목이 없는 일이라는 뜻을 여러 번 비춘 것과 같이 소설로 무엇을 보여주기 보다는 직접적인 세태비평이 많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이 당시 대한민국은 작가에게 곧 망할 나라 위로는 혼탁한 지배층 뿐 아니라 아래로 어리석은 민중들로 가득차 희망없는 나라로 보여진 것 같다.

불황에 처한 다소 각박해진 어두운 사회분위기가 종말론이라는 당시 크게 부각된 사회적 이슈로 더 긴장감을 주었다. 주인공 소년은 아마도 이런 분위기 속에 종말론을 약간 믿었고 사실은 그 보다는 '믿고 싶어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는다. 그 시절 비슷한 나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 나도 아마도 이 종말론에 많이 혹해 있었다. 이유는 아마도 그 소년 처럼 너무나 변해버린 세상이 싫었고 때로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비록 다미선교회의 속보이는 그 종말론은 믿지 않았지만 다른 자기만의 변종의 형태의 종말론을 항상 머릿 속에 한 가능성으로 의식했다. 약간은 곧 종말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92년 교회다니던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 한토막이 있다. 오랜만에 본 중학동창이자 이사간 친구였던 그도 나처럼 변종의 종말을 믿었는데 상업용 바코드 이야기와 '666'을 이야기하며 휴거나 종말이 올거라 말해 놀랐다. 하지만 공통의 배후엔 실질적인 문제 대학진학을 앞두고 다소 만족스럽지 못한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도 그 반신반의의 믿음에 한 몫하고 있음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던 일들을 들자면 '삼당합당'이 있고 검정색 유행으로 대표되는 불황의 그림자가 있었다. 호감이 갈만한 차림새와 외모의 여학생들이 죄 검정색 옷과 운동화를 신었던게 일상이었다. 1990년 바로 그 해에 사람들이 모두 자영업을 한다고 우리 동네 골목골목 주택지구를 상업용도로 변경해 음식점을 하겠다고 나섰다. 수십년 민주화투사라는 사람이 5.18의 학살자들과 담합해 거대여당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압박하게 했다. 대중문화 자체도 완전히 변해 있었다. 이경규 씨가 몰래카메라로 특정 채널 개그프로를 독식한다거나 또래나 어린 애들도 드래곤볼이니 북두신권이니 하는 일본만화를 보고 대중음악이라는 것도 죄 일본 것을 표절한 것들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훗날 모양비디오 등으로 종종 드러난 그런 비디오들 소문이 돈 것도 그 시대였다. 비록 애국과 애족을 테마로 하였지만 그 내용상 19금을 넘어설 잔인한 스토리와 장면으로 가득 찬 여명의 눈동자가 지상파로 방송되던 시기였다.

그 후로 문민시대 이래 그런 그림자는 수그러 든 것 같았다. 이 시대를 지나니 또 세상은 터무니 없이 밝게 바뀌어 있었다. 안 떨어진 상표가 강조된 옷을 입고 나온 서태지에, 신세대 X세대 담론, 화장술에서 성형술 그리고 패션에 이르기까지 각종 뷰티산업에 모두 흥청망청이었다. 이 시기에 군대갔다가 복학한 형은 이 전에는 만나면 세미나고 이 후에는 술이였다고 한다. IMF가 지나고 소비적으로 이런 풍조가 한풀 꺾였고, 이명박근혜 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한번 희망 자체가 완전히 꺾인 것 같아 이 즈음 다시 90년대초의 상황이 오버랩된다. 마치 잠복한 악령이 수십년 만에 부활한 느낌이다. 광주학살세력이 중심이된 거대여당시대라는 점과 갖은 실정을 되풀이 하더라도 고정지지율이 견고한 야당분열의 시대라는 점도 공통이다.

이런 고난의 시대에 대한 소설의 해결은 소년이 다시 가족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가 다소 심리적 안정을 되찾게 되고 세상을 감정이 아닌 이성적으로 바라보게 되어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조금은 괴기스럽고 공포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과거의 일들을 알려보고자 이 블로그를 여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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